“50년 만에 다시 대학 입학시험 발표 기다리는 기분이었어요. 전직 국립박물관 관장님들도 오신다 해서 박물관을 어떻게 보실까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평가가 좋아 기쁩니다. 그냥 개관할 때 으레 건네는 덕담이 아니라 정말 볼 만하다는 의견이 많아 마치 합격통지서를 받은 수험생이 된 느낌입니다.”
지난 11월 11일 우리옛돌박물관 개관식을 마치고 기자와 만난 천신일(72) 우리옛돌문화재단 이사장이 건넨 첫마디다. 주식회사 세중 회장이기도 한 천신일 이사장은 40여년간 사재로 모아 온 석조 유물을 추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우리옛돌박물관을 열었다. 부지가 1만8000㎡(5500평), 건면적이 3300㎡(1000평)에 달한다. 지상 3층 규모의 전시관에 야외 정원까지 전시물이 가득하다. 석물만 해도 1200점이 넘는다. 석조 전문 박물관으로는 흔치 않은 규모다.
천 이사장과 함께 박물관 1층에 있는 환수유물관(還收遺物館)에 들어갔다. 2001년 천 이사장이 일본인 사업가에게 사들이면서 되찾아온 조선시대의 문인석(文人石) 70점 중 47점이 전시된 공간이다. 공복(公服)을 입은 문관들이 머리에는 관(冠)을 쓴 채 두 손에는 홀(笏·조선시대 관원이 공복 차림일 때 손에 쥐었던 작대기 모양의 판)을 쥐고 있었다. 천 이사장은 “우리 박물관의 가장 큰 자랑이 이 환수한 문인석”이라고 했다.
천 이사장은 이 문인석을 구하기 위해 남모르는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다. 2000년 8월경 한 모임에 참석한 그는 “일본에 한국의 석조 문화재를 많이 가진 사업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천 이사장은 수차례 일본 나고야로 건너가 석물의 주인 구사카 마모루(日下守)씨를 만났다. 하지만 구사카씨는 천 이사장에게 유물을 팔지 않겠다고 했다. 일본에서 석조 유물의 일반적인 거래가는 한국보다 5배는 높았기 때문이다. 천 이사장은 1년간 수시로 구사카씨를 찾았다. 지병으로 고생하는 그를 한국으로 초청해 국내 유명 한방병원에 데려갔고, 김치를 좋아하는 구사카씨 부부를 위해 천 이사장의 부인이 직접 담근 김치를 보냈다. 2000년 개관해 자신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용인의 세중옛돌박물관에 데려가 ‘당신이 유물을 팔면 여기 전시할 것’이라고도 했다. 동시에 전문가를 대동해 문화재가 맞는지도 꼼꼼히 확인했다. 감격한 구사카씨는 천 이사장에게 문인석 70점을 한국 거래가에 넘겼다.
구매가 전부는 아니었다. 운반도 어려웠다. 나무로 짠 상자에 넣은 유물을 컨테이너에 싣고 해운을 통해 부산항으로 가져와야 했다. 기중기까지 동원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천 이사장은 2001년 이 유물들 70점을 모두 용인 세중옛돌박물관에 가져왔다. 이 중 47점을 이번에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에 옮겨 왔다. 다른 23점 중 4점은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고, 나머지는 세중옛돌박물관에 있다. 천 이사장은 “아직 일본의 교토, 도쿄 등지 박물관에는 비슷한 석조 유물들이 수천 점 더 있는 걸로 안다”며 “앞으로도 일본인들을 설득해 더 돌려받을 계획”이라고 했다. 다음은 우리옛돌박물관 학예실 안에 있는 천 이사장의 집무실에서 진행한 일문일답.
- 40년 가까이 석조 유물을 모았는데, 특별히 석조 유물을 모은 계기가 있나. “젊을 때부터 고서화나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 가끔 인사동에 들렀다. 1978년 어느날 단골집에 갔더니 주인이 석조 유물 사진이 있는 앨범을 테이블에 좍 펴놓고 일본인 손님과 흥정을 하고 있더라. 손님이 나가자마자 주인의 멱살을 잡고 ‘왜 우리 유물을 일본에 팔아넘기냐. 당신은 배알도 없냐’고 외쳤다. 주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장사꾼한텐 돈 많이 주는 사람이 장땡’이라고 했다. 멱살을 쥔 채 ‘이 앨범에 있는 것 다 합쳐서 얼마냐. 내가 다 사겠다’고 했다. 석조 유물이 모두 27점이었는데, 당시 돈으로 1억7500만원을 달라고 하더라. 젊은 혈기에 산다고 하긴 했는데 막상 가격을 들으니 손이 떨렸다. ‘너무 비싸니까 조금만 깎아달라’고 해 1억5000만원에 모두 샀다. 사서 집에 두고 보니 아침 해 뜰 때와 저녁 해 질 때,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 모두 돌 빛깔이 다른 게 참 보기 좋았다. 그때부터 ‘우리나라 석조 유물이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석조 유물로 박물관까지 세울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1997년 이화여대 박물관장이던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우리 옛 돌조각의 힘’이란 제목으로 석조 유물 전시회를 열었다. 이화여대는 개신교 재단이 세운 학교인데, 불교적 특성이 강한 석조 유물을 전시한다는 게 신기해 전시회를 찾았다. 거기에서 김 관장과 당시 학예실장이던 나선화씨(현 문화재청장)를 만났다. 얘기를 나누다 내 집에 있는 돌들을 보여주니 김 관장이 ‘이건 혼자 보기 아까운 문화재다. 우리가 전시 레이아웃이나 방법 등은 모두 지원해 줄 테니 박물관을 열자’고 했다. 그래서 2000년에 용인에 세중옛돌박물관을 열었다. 그런데 서울에 사는 분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은 용인의 박물관에 가기 어렵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래서 성북동에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땅에 박물관을 지었다. 아직 대중교통 수단이 없는 게 흠이지만 추후 마을버스 노선이 생길 예정인 것으로 안다. 당장은 작은 버스를 구입해 무료로 운행할 계획이다.”
- 개인적으로 소장한 유물이 상당한데, 주로 어떻게 구했는가. “환수 유물을 제외한 유물들은 국내 골동상을 통해 샀다. 반드시 골동상 허가가 있는 사람을 통해서만 샀다. 아무 장사꾼한테서나 막 사면 도난품일 경우 장물취득죄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골동상 허가가 있는 사람하고 거래하면 문제가 생겨도 그 사람(골동상)이 책임을 지지 내가 지는 건 아니니까. 골동상에게 석조 유물을 파는 사람은 미대 교수들이 많았다. 단독주택에 살면서 석조물을 모으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파는 경우도 있었고, 자식들 결혼시키면서 목돈이 필요할 때 파는 경우도 있었고. 근데 종종 무덤 앞에서 찍은 사진을 들고 와서 ‘이 돌 원래 주인인데 도난당했다’며 유물을 돌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무조건 돌려줬다. 그리고 나서 골동품 상인한테 ‘이거 도난품이라고 해서 돌려줬으니 돈을 내놓든지 비슷한 물건을 가져오든지 하라’고 해 해결했다. 여기 전시한 물품들은 용인에 15년간 보관하면서 검증을 거친 물품들이라 더 이상 시비가 생길 일은 없다고 본다.”
- 문인석을 제외한 석물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유물은 무엇인가. “장군석이다. 일종의 무인석(武人石)인데, 문인석과 함께 묘 앞에 뒀던 유물로 알고 있다. 우리 박물관에 있는 장군석은 자세히 보면 귀면(鬼面)이라고 해서 어깨와 팔에 사람 얼굴이 있다. 귀신을 쫓고 병마를 물리치는 상징이다. 옆면과 뒷면을 보면 갑옷도 있다. 조각된 모습이 아주 정교해 애착이 간다.”
- 우리옛돌박물관을 기획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 석조 유물 관련 전문가가 많지 않다. 자문을 구하면 학자마다 설(說)이 달라 골치가 아팠다. 예를 들면 유물이 만들어진 시점을 측정할 때 석상의 표면 상태나 의복 양식을 보고 판단하는데, 학자가 적다 보니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정도는 구분하지만 고려 전기인지 후기인지는 확실히 구분이 안 된다. 우리 박물관 유물 중에는 3층석탑이 신라시대 양식이라고 해서 가장 오래된 걸로 아는데, 그것도 정확한 제작 시점은 모른다. 공부해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고 본다. 전문가들이 석조 유물을 연구하는 데 우리 박물관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