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수유물관 유물은 야외전시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문인석은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조각이다. 천 년간 한결같이 능묘를 지켜온 문인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중 천신일 회장은 “거듭된 전란으로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아오고,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싶다.”는 집념으로 해외로 흩어진 문화재 환수에 힘을 쏟았다. 2000년 서울의 한 모임에서 많은 석조유물을 소장한 일본인 쿠사카 마모루日下 守씨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여러 차례 일본으로 그를 찾아가 설득하며 문화재를 찾아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1년 그의 소장품 중 상태가 양호하고 조각기술이 우수한 문인석과 장군석, 동자석 등 70점을 환수하였다. 제1전시관인 환수유물관에서는 환수유물 70점 중, 문인석 47점을 전시한다. 전시관의 분위기는 어둡고 경건하게 꾸며졌다. 기존의 전시방식에서 탈피하여 돌을 응집하여 전시함으로써,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 이 땅에 돌아온 한국 돌의 힘과 위엄을 보여주며 묵직함을 넘어선 압도감을 보여주고자 한다. 칠레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영국의 스톤헨지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웅장한 돌문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문인석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앞에 한 쌍식 세워,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물이다. 공복公服차림의 문관의 형상으로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량관金梁冠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다. 능묘 주위에 문인석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前漢代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신라시대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능묘제도가 정비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문인석은 당시의 조각양식을 보여주고 우리나라 능묘제도의 변천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시관에 있는 대부분의 문인석은 짝이 맞지 않는 모습이다. 처음에 일본으로 팔리거나 밀반출되었을때에는 짝을 이루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여기저기 팔려다니며 짝을 잃어버리고 혼자 한국 땅에 돌아온 것이다. 따라서 환수유물관은 다시 찾아온 유물을 전시함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건너간 문인석들은 현재에도 일본의 교토 국립박물관, 도쿄의 네즈 미술관의 정원에 다수가 전시되어있다. 앞으로 우리옛돌박물관은 일본 및 해외에 있는 석조 문화재 환수에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이다.
홀笏
문인석이 손에 쥐고 있는 물건으로 '홀'이라고 한다. 이는 신하가 왕을 알현할때 왕에게 아뢸 말씀, 혹은 왕이 하시는 말씀을 붓글씨로 메모하기위한 물건이었다. 초기에는 메모용으로 손에 들었지만, 나중에는 의례적으로 손에 갖추어 들게 되었다. 조선시대 법에 따르면 1품-4품의 신하는 상아로 만든 홀을, 5품-9품의 신하는 나무로 만든 홀을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