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외 전시실에 가득
1978년 인사동 골동품 판매점에서
일본인에게 넘어가려는 동자석 등
석조물 27점 천신일씨 떠안아
2001년에도 석조물 70점 일본서 환수
소유주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갖은 애
정성에 감복한 소유주 70점 중
16점만 돈 받고 나머지 54점은 기증
1층 환수유물관, 2층 동자관·벅수관
성북구 성북동 성북02 마을버스 종점에 내리면 우리옛돌박물관이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 우리의 전통이 담긴 석조 유물을 모아 여러 사람과 그 의미를 나누고자 하는 한 사람의 뜻이 담긴 곳이다. 문인석, 무인석, 석양, 벅수, 동자석, 관솔대, 기우제단, 장명등, 미륵불, 마애불, 돌 호랑이, 신라 시대 수세식 화장실에 쓰이던 돌 등이 실내 전시관과 야외 전시장에 가득하다.
청년 사업가, 석조 유물 수집가가 되다
1978년의 어느 날 인사동 골동품 판매점을 찾은 한 청년 사업가는 일본인과 골동품 판매점 주인이 우리나라 석조 유물 사진첩을 펼쳐놓고 값을 흥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젊은 혈기에 우리 유물을 일본인에게 팔아넘기지 말라며 주인에게 따졌는데, 그저 물건 파는 사람이 값을 더 많이 주는 사람에게 파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주인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금세 자신도 모르게 내가 사겠다고 말해버렸다. 당시 돈으로 1억5천만원, 모두 27점의 석조 유물이었다. 그가 현재 우리옛돌문화재단 천신일 이사장이다.
당시 그는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 사업가들에게 베푸는 가장 좋은 대접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국인 사업가와 만나는 공간을 우리의 전통 예술 작품으로 꾸미면서 인사동 출입이 잦았던 것이다. 하지만 석조 유물은 처음이었다.
계획에도 없었던 석조 유물을 곁에 두고 보던 그는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석조 유물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렸다. 날씨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돌에 자연스레 마음을 얹게 됐고 석조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여 년 뒤 경기도 용인에 세중옛돌박물관을 열었다. 이후 더 많은 사람이 좀더 쉽게 찾아와 우리의 석조 유물을 볼 수 있도록 성북동 개인 소유의 땅 5500평에 우리옛돌박물관을 짓게 된 것이다.
1978년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샀던 그의 첫 석조 유물은 무인석, 동자석, 벅수 등인데, 지금도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일본에 있던 석조 유물을 환수하다
그에게 2001년은 평생 잊지 못할 한 해다. 그해에 일본에 있던 우리의 석조 유물 70점을 환수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소장자의 마음을 돌리는 일도, 석조 유물을 우리나라로 들여오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는 2000년에 일본 미에현에 사는 구사카 마모루라는 수집가를 찾아갔다. 당시 구사카는 한국 거래가의 다섯 배가 넘는 값을 요구했다. 일본 골동품 시장에 형성된 가격대를 조사해보니 구사카가 제시한 금액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구사카는 값은 제시했지만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일본으로 찾아가 그를 설득했지만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래서 구사카를 한국으로 초대해서 세중옛돌박물관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풀어보자고 마음먹었다. 우리 전통의 생활과 문화가 담긴 석조 유물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국에 퍼져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직접 경험하게 했다. 그 경험의 하나로 지병이 있던 그에게 서울의 유명한 한의원에서 진맥하고 한약을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 김치를 좋아한다는 그를 위해 천 이사장의 아내가 담근 김치를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6개월, 드디어 구사카의 마음은 돌아섰다. 70점의 석조 유물 중 16점은 값을 치르고 사고, 54점은 기증받기로 했던 것이다.
무거운 석조 유물 70점을 우리나라로 들여오는 게 문제였다. 나무 상자 하나에 석조 유물 한 점씩을 담아야 했다. 석조 유물을 옮기고 싣는 데 기중기를 동원해야 했다. 석물은 목이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충격을 줄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 대형 컨테이너 3대가 가득 찼다. 일본 나고야항을 출발해서 부산항에 도착했다. 통관 절차를 마치고 박물관까지 안착, 파손된 것이 없다는 것을 다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옛돌박물관을 돌아보다
우리옛돌박물관 1층 환수유물관에 47점의 환수 유물을 전시했다. 2001년 일본에서 환수한 70점 중 47점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다. 전시의 주제를 표현한 한마디가 마음에 닿는다. ‘바다를 건너온 돌사람, 고국의 품에 안기다’ 환수유물관에 전시된 것은 모두 문인석이다. 환수유물관 분위기가 엄숙하고 진중하다.
2층에는 동자관과 벅수관이 있다. 동자관은 동자석을 모아놓은 곳이다. 동자석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왕족과 사대부의 무덤에 있던 석물이다. 동자는 도교에서는 신선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나 보살을 곁에서 모시며, 유교에서는 무덤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라고 한다. 동자관 입구에 전시된 제주 동자의 모습이 재미있다. 제주도 동자석 중에 제기를 차는 모습의 동자석도 있다.
벅수관은 벅수를 모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벅수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워 잡귀·잡신을 막고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을 마을로 못 들어오게 하는 등 재화를 막고 복을 가져다주길 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돌장승이다. 벅수의 품에 새겨진 문양이 다양한데, 그 문양에 따라 기원의 종류가 다르다고 한다.
2층 로비에는 갑옷을 입고 칼을 짚고 있는 무인석이 있다. 무인석의 양쪽 어깨와 칼에 도깨비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졌다. 전쟁터에서 자신을 지켜달라는 주술적인 의미의 문양이다. 박물관 건물 주변 야외에 전시된 석조 유물도 많다. 야외 전시장 중 가장 높은 곳에 동자석과 벅수가 있다. 전망도 좋다.
길을 따라 이리저리 다니며 잘 꾸며놓은 정원 같은 야외 전시장 곳곳에 놓인 석조 유물을 본다.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제단, 민간에서 만든 부처상인 민불은 높은 곳에서 서울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거대한 미륵상, 작은 동산에 놓인 불상들,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장군석과 동자석, 벅수를 보며 내려오는 길, 문인석이 도열한 곳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관람객을 배웅하는 건 돌로 만든 거대한 호랑이상인 석호다.
석호의 배웅을 받으며 박물관 문을 나선다. 석조 유물 전시관답게 박물관은 끝까지 관람객의 마음을 붙잡는다. 박물관을 드나드는 정문은 큰 문과 작은 문 두 개로 돼 있다. 그중 작은 문 기둥 아래에 양각된 도깨비 문양의 석물이 있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의 액운을 물리치고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7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