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07.01 13:36
일제강점기에 닥치는대로 식민지 조선에서 불법반출한 문화재가 부지기수지만 합법적인 거래를 통해 가져간 것들도 헤아릴 수 없다. 특히 정원 꾸미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탑이나 석등, 부도 등은 물론이고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과 장군석, 동자석, 장명등까지 닥치는대로 가져갔다. 김지훈 우리옛돌박물관 학예사는 “화강암이 없는 일본에서 특히 선호된 석조문화재들”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1927년 일본 도쿄 인근에서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경매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유명한 자산가였던 요시이에 게이조(吉家敬造)와 도부철도주식회사(東武鐵道株式會社) 사장인 네즈 가이치로(根津嘉一郞) 사이에 벌어진 경매전이었단다. 요시이에는 와세다대(早稻田大)를 졸업한 후 사업을 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자주 왕래했고, 평소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기에 조선미술품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정치가 겸 사업가였던 네즈 역시 1920년대 전라남도 순천 일대의 철도 부설과 관련한 일로 조선에 체류하고 있었다. 언필칭 고미술애호가였던 네즈였지만 문인석·동자석·석탑·석등·부도 등 많은 석조유물을 정원 장식물로 사용하려고 유출한 자였다. 네즈는 그렇게 유출한 수많은 수집품을 전시하려고 1941년 네츠미술관(根津美術館)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요시이에가 그런 네즈를 상대로 양보없는 경매전쟁을 벌여 조선의 장군석과 장명등 등 석물을 낙찰받았다. 요시이에는 이 석물들을 게이오대(慶應大) 근처에 있는 3000평이 넘는 정원에 석물을 배치했다.
요시이에는 이후 별장이 밀집된 에노시마(江島)에 1000평 이상의 부지를 확보하고 그곳에 정원이 딸린 별장을 신축했다. 당연히 낙찰받은 조선의 석물들을 이전배치했다. 이 석물들은 요시이에의 외동딸인 오시이에 하루코(吉家晴子)와 그의 막내아들인 오자와 테리유키(尾澤輝行)를 거쳐 관리·보존됐다.
그러나 요시이에의 외손자인 오자와는 별장 정원의 전면개발을 계획했고, 그 과정에서 석물의 제자리인 한국으로 반환하기로 결심했다. 오자와는 마침내 국제회의 및 전시 등 민관 행사를 기획하는 제이넷컴의 장선경 부사장을 통해 우리옛돌박물관에 이 석물들을 기증했다.
우리옛돌박물관(이사장 천신일)은 오는 2일 오후 4시 요시이에의 외손자인 오자와 부부가 기증한 석물 8점에 대한 환수기념식을 연다. 92년만에 돌아온 셈이다.
환수되는 석물 중 장군석은 조선 중기로 추정되는 능묘를 지키는 장군의 형상을 한 석인이다. 갑옷을 입고 칼을 쥔 모습이 근엄하고 당당하다. 무덤의 주인공을 경호하는 위세를 보이려고 턱을 목에 붙이고 있으며 치켜 올린 눈과 눈두덩에 힘이 넘친다. 챙이 없는 둥근 투구를 쓰고, 이마와 귀를 덮는 드림이 위로 접혀있다. 양 어깨의 갑옷에는 귀면문(鬼面文)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아래로 소슬문이 장식되어 있다. 손을 모아 귀면상이 새겨진 칼자루를 꽉 쥐고, 검 끝이 아래로 향하게 하여 직립자세를 취하고 있다. 김지훈 학예사는 “문인석과 달리 장군석은 왕이나 왕족, 공신의 무덤을 호위했기 때문에 높은 위상의 무덤에서 보인다”면서 “문인석에 비해 매우 드물게 확인되는 유물”이라고 전했다.
‘사모지붕 장명등’은 체석(體石)에 커다란 직사각 형태로 뚫어 불을 놓는 장소인 화창(火窓)을 마련했다. 덮개는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를 석탑의 상륜부의 장식처럼 치장했다. ‘팔각지붕 장명등’은 4면에 정사각형의 창을 모두 뚫어서 화창(火窓)을 만들었다. 대석 각 면마다 안상문(眼象文)과 연판문을 새겼으며 두 부분을 체감하여 마디처럼 장식했다. 이밖에도 묘비를 받쳐놓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받침’도 기증됐다
김지훈 학예사는 “그러나 이 장군석과 장명등 등 석물들이 누구의 무덤에서 반출된 것인지, 얼마의 액수로 경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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