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 실내 전시실의 문인석. 이 석조물이 누군가의 무덤 앞에 서 있었음을, 마치
어둠과 빛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절제된 조명은 돌의 형태와 질감을 도드라지게 해 자연의 빛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표정까지 드러나게 한다.
알고보면 쓸데 많은 신비로운 서울 명소
자신이 기거하는 곳을 ‘여행목적지’로 바라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여행은 비일상을 지향하는데, 일상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서울을 여행목적지로 정하기까지 적잖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매혹적인 두 곳의 박물관, 그리고 살아생전의 삶, 혹은 죽음의 공간을 보여주는 공동묘지 두 곳을 갔습니다. 익숙한 도심의 거리에서 진행되는 ‘미식 투어’에도 동행했고 젊은이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는 호텔도 들렀지만 미술관과 묘지 얘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그 얘긴 나중에 들려드리기로 했습니다. 지금 여기 소개하는 곳들은 서울을 대표하는 곳이 아니고, 서울의 명소가 이곳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서울을 보면서 알게 된 건 우리가 익숙한 줄 알았던 서울에 뜻밖에도 수많은 흥미로운 여행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깨달은 건 일상의 지루한 공간이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여행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우리 돌의 직관적인 아름다움
서울이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것 중 하나가 ‘수준급의 박물관’이다. 서울에서 박물관을 골랐다. 전시 수준은 물론이고, 경관이나 분위기까지 빼어난 곳을 뽑기로 했다. 참고한 건 서울관광재단이 정한 ‘서울 유니크 베뉴’ 목록. 재단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연회나 회의, 만찬 등을 진행할 수 있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서울의 공간 76곳을 ‘유니크 베뉴(Unique Venue)’로 정해뒀다. 유니크 베뉴 목록의 박물관 가운데 추천받은 곳은 두 곳. ‘우리옛돌박물관’과 ‘한국가구박물관’이다.
서울 성북동의 비탈진 언덕에 들어선 ‘우리옛돌박물관’은 본래 경기 용인에 있었다. 용인에서 처음 박물관 문을 연 게 2000년 7월. 그리고 15년 만인 2015년 11월에 박물관은 서울 성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물관이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온, 거의 드문 경우다. 박물관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면, 박물관이 돌을 모으고 전시한 용인에서의 15년의 시간은 아마도 ‘돌의 물성(物性)에 대한 이해’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박물관의 전시는 세심하고 정교하다.
우선 박물관에 전시된 돌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부터. 3층 건물과 외부정원을 합쳐 1만8182㎡(5500여 평)에 달하는 박물관에는 1300여 점의 돌이 있다. ‘돌’이라고 하지만, 박물관에 있는 건 수석(水石) 같은 자연미의 돌이 아니라, 돌로 세운 전통미 넘치는 석조 조형물이다. 정원과 실내 전시실에는 사대부들의 무덤에 세운 문인석과 석불을 비롯해 벅수, 동자 등 다양한 형태의 돌이 가득하다. 이런 돌들이 하나둘이 아니라 거대한 군집을 이뤘다. 문인석과 벅수 등을 모아놓은 게 ‘무슨 볼거리가 될까’ 싶은데, 가서 보면 예상과 전혀 다르다.
옛돌박물관의 석조유물들은 다른 역사유물들과는 달리 그저 형상과 질감과 느낌을 직관적으로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별다른 공부나 역사적 지식이 필요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문인석을 보자. 문인석은 다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한데 모아놓고 보면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세련된 느낌의 미남 문인석이 있는가 하면, 서툴게 깎은 못난이도 있다. 서구형 이목구비를 갖춘 것도, 툭 불거진 눈으로 해학미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도 있다. 의인화된 형상이나 표정뿐만 아니다. 문인석의 돌의 재질과 질감에 따라서도, 빛의 방향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투박하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도 있고, 매끄러운 질감과 조각으로 세련미를 물씬 풍기는 것도 있다.
문인석도 그렇지만, 돌로 만든 장승인 ‘벅수’나 주로 무덤가에 놓던 동자석은 한결 더 표현이 자유롭다. 벅수는 마을 어귀에 세워 전염병과 잡귀를 쫓았는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피리를 들고 있는 벅수다. 들고 있는 피리는 신라 문무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만파식적이란다.
동자석은 분방한 옛사람들의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석물이다. 동자라면 도교에서는 신선 곁에서, 불교에서는 부처님 곁에서, 유교에서는 무덤 주인 앞에서 그들을 모시는 역할을 한다. 무덤 주인 앞을 지키는 건 문인석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박물관의 전시물의 절반 이상이 죽은 자의 무덤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무거운 죽음 앞에서 저리도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새삼스럽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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